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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에바리스트의 스토리.

연표[]

3395년 [진창]
3397년 [만찬회]
3389년 [탈출]
3398년 [우상]
3398년 [결말]
3389년 [각오]

레어 카드[]

R1[]

에바리스트 r1

에바리스트 r1 full

3395년 [진창]

오후를 지나서 차가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심하게 포격을 당한 땅이 진흙구덩이로 변해 에바리스트의 발 밑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륙의 동쪽, 반사이드와의 국경지역에 있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교착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더러워진 아이자크의 전투복이 전투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토성 근처에 이르렀을 때, 아이자크가 속삭이듯 말했다.
"함정에 빠졌구나."
그러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에바리스트를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래서 온 거야.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희생은 필요한 법이지."
"희생이라... 네 부하들이 불쌍하다."
"그러는 너도 내 부하다."
"나는 전쟁을 좋아해. 즐기고 있다고."
"이제부터 더 즐거워질지도 몰라. 저길 봐."
아이자크는 몸을 내밀어 토성을 건너편을 살펴보았다.
"알겠어?"
건너편 강가의 제방 쪽에서 병사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전투장비는 지금까지 싸워 온 반사이드군의 장비와는 분명히 달랐다.
"원군인가?"
"인페로다의 병사들이다. 전투 짐승을 데리고 왔어."
에바리스트는 시드로 장군에게 받은 지령을 아이자크에게도 전하기로 결심했다.

-제국의 수도 파이드-
"나는 불안해 하고 있다네."
장군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군에는 마치 관료 같은 군인이 너무 많아."
시드로 장군은 휘하 사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에바리스트를 특히 눈 여겨 보고 있었다.
"나는 자네를 높이 사고 있다네. 바르트 대위."
작은 체구를 지닌 장군의 깊은 주름에 둘러 쌓인 날카로운 눈빛이야말로 위엄의 상징이었다.
"특히 군인으로서의 자네보다 전사로서의 자네를 말이네."
장군은 그란데레니아의 제국군에 있어서 특별한 인물이었다.
서광의 시대가 시작되고 지상의 많은 것들이 혼돈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군사력을 증강하고 제국의 영토를 확장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많은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며 제국의 위상을 크게 드높였다.
그러나 너무나도 큰 성공으로 인해 오히려 제국 내부에서의 지위가 위험해 지고 있었다.
루비오나 왕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서부전선에서는 일진일퇴의 상황이 이어지자, 군 내부에서의 정치력에 그늘이 생겨나고 있었다.
"고향은 어디인가? 제국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들었네만."
여태까지의 회식은 다른 사관들과 함께 전황이나 요구사항 등을 의논하는 정형화된 자리였지만, 오늘 부름을 받은 것은 에바리스트 뿐이었다.
"포레스트 힐입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어릴 때,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에바리스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장군의 본심을 모르는 동안에는 교섭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민 신분으로 제국에서 자랐고 열일곱 살 때에 군에 지원했습니다."
"군에 지원한 동기는 무엇인가?"
"제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입니다.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에바리스트의 눈을 지굿이 응시했다.
"그렇군. 자신의 출신이나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나?"
"자신을 불쌍히 여길 생각은 없습니다. 감정이란 것은 어차피 행동에 의한 것입니다.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감정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말투군. 하지만 전선의 지휘관으로서는 믿음직스럽군."
장군은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장군님,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바리스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급하게 굴지 말게 대위. 일단 들어보게나"
"인생에 목적은 없네.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든,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든 결국은 죽게 되네."
"하지만 전쟁은 다르네. 어디에서 시작되든 반드시 승리라는 목적이 있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네."
장군은 일어서서 벽에 걸린 지도로 향한다.
"전선은 나날이 넓어지고 있네. 서부에도, 도우에도, 남부에도 말이네.
그리고 그 모든 전장에서 우리들은 승리할 것이네."
독특한 빛이 뒤돌아 선 장군의 눈에 깃들어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이런 일그러진 성정이 작은 체구의 남자를 장군으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느꼈다.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네."
"들어주었으면 하는 부탁이 하나 있네. 자네 같은 남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특별한 임무라네."

-마이오카 국경-
아침이 되었다.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건너편 강가에서 전투짐승 세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장은 3알레(4.5미터)정도지만 몸통도 3알레 정도의 폭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이 이 곳까지 전해졌다.
그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이 이 곳까지 전해졌다.
인페로다의 짐승 기병이 등에 타고 있었다.
튀어나온 주둥이에는 구속구가 부착되어 있고, 구속구에 연결된 고삐를 짐승 기병이 붙들고 있다.
이제 이미 전투 짐승의 타입을 파악했다. 예전에는 [토베어]라고 불리던 타입이다.
걸을 때는 4족 보행을 하지만 먹잇감을 잡아 먹을 때는 일어서서 앞발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갑각류 같은 두꺼운 붉은색 피부와 강력한 치유 능력을 지니고 있다.
확실히 전쟁에서는 도움이 되는 타입이다.
거대한 짐승은 장벽기를 뒤로 끌면서 천천히 다리로 향한다.
반사이드의 공병들이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거대한 짐승이 끌고 있는 장벽기의 힘으로 총탄이나 포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적의 공병들은 아군이 다리에 설치해 둔 지뢰나 장애물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반사이드나 인페로다에는 기술을 관리하는 [엔지니어]들과 연계가 약하여, 아군이 사용하는 자동기계나 고성능 대포 같은 무기는 없었지만, 방어를 하기 위해 어느 도시에나 존재했던 장벽기의 기술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기사단은 이미 집결해 있었다.
에바리스트의 당번병이 [오토 호스](기계 말)의 곁에 서서 에바리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 타고 당번병에게 기병소총[카빈]을 건네 받은 후, 약실을 확인하고 나서 안장에 꽂아 넣었다.
당번병도 자신의 말에 탔고, 다른 기사단원도 전원 말에 올랐다.
에바리스트는 검을 뽑아 들고 기사 단원을 향해 소리 쳤다.
"우리 제국군의 본대는 현재 루비오나와 교전 중이다.
지금 여기 마이오카에 우리의 후방을 노리는 반사이드군이 침공해 왔다. 이것은 폭동이다.
게다가 그 배후에는 사악한 짐승을 거스린 인페로다가 있음이 밝혀졌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서쪽에서 싸우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서! 고국에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인페로다의 기세를 여기서 무너뜨릴 것이다!"
"사악한 짐승을 두려워 마라, 패배의 치욕을 두려워하라!"
기사 단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모두 한결같이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전투에 대한 의욕이 나타나 있었다.
"가자!"
보좌관인 아이자크가 대열을 정비시켰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의 옆에 섰다.
"자. 즐겨볼까? 살아있을 동안에 말이야."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의 아이자크의 뒤에는 당번병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이자크 중위, 쓸데없는 소린 그만둬. 당번병을 본받으라고."
당번병은 갑작스러운 말을 들어 놀란 얼굴로 아이자크를 바라본다.
"야단 맞았다. 대위님은 무섭구나."
기사단이 진지에서부터 기세를 올리며 뛰쳐나갔다.
아군 공병이 설치한 장애물을 기계 말들이 춤추듯이 피하며 나갔다.
공학사 [엔지니어]가 만든 자동기계 [오토마타]의 정교한 움직임으로 말과 기병이 미끄러지듯이 전진하고 있었다.
장애물을 제거하고 있던 반사이드의 공병들은 작업 장소에서 재빠르게 물러나며
원래 있던 건너편 강가를 향해 뛴다.
하지만 바로 기계 말에게 따라 잡혀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과 말에게 짓밟히며 마치 넝마조각처럼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반사이드의 짐승 기병들은 돌진해오는 기병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삐를 당기며
구속구를 풀려 하고 있었다.
말을 멈추고 카빈을 뽑아 짐승의 위에 탄 짐승 기병을 겨냥한다.
아직 50알레(75미터)이상은 되어 보이는 거리였지만 흔들리는 표적을 정확히 겨냥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에바리스트는 확실하게 [끝]에 선 것을 깨달았다.
힘을 사용할 때다. 눈 안에 가늠쇠 건너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짐승 기병들의 [미래]가 보였다.
흔들리는 총구와 미래의 영상이 겹쳐지고 있었다.
짐승 기병이 쓰러지는 영상을 정확히 포착한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마치 한 번 시간이 되돌려진 것처럼 일어선 기병이 다시 쓰러졌다.
짐승 기병은 짐승의 안장에서 축 늘어지는 듯하더니 숨이 끊어졌다.
일렬로 선 짐승의 안장에 타고 있던 나머지 짐승 기병 두 명도 같은 방법으로 쓰러뜨렸다.
"대위님, 대단하십니다!"
당번병은 두려워하던 거대한 짐승이 힘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고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그는 멈춰 선 자신과 함께 남아 있었다.
"됐으니까 전진하게. 다리를 다 건너고 난 후부터가 중요해."
당번병과 함께 단숨에 선발대를 따라 잡는다. 거대 짐승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간다.
[토베어]는 왠지 맥이 빠져 버릴 정도로 움직이지 않았다.
힘 없이 늘어진 짐승 기병의 시체를 힐끗 쳐다본 후 장벽기구가 있는 후방으로 향했다.
"이건 뭐 그냥 짐을 실어 나르는 말이네요."
당번병이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선발대가 장벽기 근처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
장벽기는 전투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방어 병력이 붙어있다.
말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다.
"무슨 일이야?"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난리도 아니야. 뚫을 수가 없어."
아이자크가 대답한다.
"시간이 없어. 둘이서 돌파하자."
아이자크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와 아이자크를 따라 와. 반드시 기관총은 처리하겠다."
좌우에서 동시에 뛰어들면 반드시 둘 중 한 명은 기관총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다면 건너편 강가의 본대는 처리하지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한다.
"가자!"
말을 하자마자 동시에 뛰쳐나갔다.
기관총 사수는 잠시 망설인 후에 에바리스트 쪽으로 총구를 겨눴다.
에바리스트는 몸을 숙이고 기계 말을 몰면서, 기관총이 발사 되기를 기다렸다.
몇 발 정도라면 기계 말이 버틸 수 있고 총을 급소에 맞지만 않으면 죽지는 않는다.
총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기계 말이 제어를 잃고 장벽기 바로 앞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말에서 내팽개쳐져 지면에 세게 부딪혔다.
아픔은 느꼈지만 뒤따라오는 기계 말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후속 병력은 능숙하게 에바리스트를 피하며 전진했다.
방어 병력의 기관총은 아이자크가 처리한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당번병이 곁으로 다가왔다.
"말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괜찮네, 뒤에 태워주게."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은 것 같았다.
잃어버린 카빈을 당번병에게 빌려서 기계 말의 뒤에 탔다.
장벽기구를 확보하고 다리의 3분의 2지점을 지났을 때, 다리 건너편에서 후속 병력인 장갑병들이 밀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훈련된 장갑병은 기병에게는 위험한 존재였다.
말발굽으로 짓밟으며 유린하려 해도 사기를 유지하고 있는 장갑병을 상대하기에는 불리하다.
에바리스트는 말 위에서 장갑병의 중대장 표식을 달고 있는 자를 겨냥했다.
방아쇠를 힘껏 당긴다. 공이치기가 떨어지며 공이가 뇌관을 때린다.
가스압력에 의해 가속된 철갑판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모든 감각이 이어져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되는 원리처럼 총알은 정확하게 좁은 틈 상태나 다름없는 장갑병의 눈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꾸라지듯이 쓰러지는 중대장. 적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다음 총알을 선두의 장갑병에 맞추려는 순간, 앞서 가던 아이자크가 갑자기 시야에 들어왔다.
말에서 내린 아이자크는 현란한 몸놀림으로 눈앞의 적들을 쓰러뜨리고 있다.
장갑병의 스피드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적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전선을 따라잡은 에바리스트는 말에서 내려 아이자크와 함께 검을 휘두른다.
아이자크와 함께 장갑병을 이곳으로 유인하며 다른 단원들을 앞으로 보냈다.
후방에 있던 적의 부대는 기병들이 도착하자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병력의 버팀목이었던 거대 짐승과 장갑병의 패배를 보고 공포를 느낀 것이다.
아이자크는 장갑병의 목에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었다.
곁에서 전황을 확인해가며 싸우고 있던 에바리스트는 승리를 확신했다.
손실이 심했지만 목표로 삼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들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다.
에바리스트의 결의는 피로 얼룩진 전장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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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리스트 r2

에바리스트 r2 full

3397년 [만찬회]

궁전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만찬회에는 귀족과 정치가, 고급관료 등 이른바 제국의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이날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도 초대받았다.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사실 이번 만찬회는 확대파가 모이는 자리나 다름없어서, 통제파의 주요 인물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거창하기만 한 파티군. 우린 전쟁 중인데."
아이자크는 불평을 하면서도 차려진 음식을 허겁지거 먹고 있었다.
"로스바르드 대위,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된다네."
"예예, 시드로 장군 각하, 실례했습니다."
뒤돌아보니 장군이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서 있었다.
"모처럼만의 만찬회가 아닌가. 좀 더 즐기도록 하게."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 식사도 꽤 훌륭하네요. 하지만 제게는 이런 자리보다 전장에 있는 편이 훨씬 즐겁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하기 그지없군. 그런데 바르트 소령은 어디에 있나?"
아이자크는 포크를 든 손으로 에바리스트가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
"호오. 역시 대단하군."
에바리스트는 혼기가 찬 아가씨들과 춤을 추고 있었다.
군인답지 않은 발놀림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아가씨들은 모두 확대파 세력가들의 영애일 것이다.
제국군 확대파의 젊은 영웅일 뿐만 아니라 외모마저 뛰어나다.
당연히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바르트님, 다음은 저와 부탁드립니다."
"아뇨, 저와.."
"아니에요, 저예요!"
시드로 장군은 곡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에바리스트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폭풍처럼 밀려드는 영애들의 목소리 때문에 끼어들 틈이 없다.
시드로 장군은 큰 헛기침을 하며 영애들과 에바리스트에게 말을 건다.
"아가씨들, 미안하지만 잠시 소령을 빌려도 괜찮겠나?"
"안돼요!"
제각각 떠들던 목소리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명확한 거부 의사를 나타낸다.
에바리스트가 요청의 말을 꺼낸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잠시 후에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에바리스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기다릴게요."
"이거야 원, 내 지위도 아가씨들 앞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 같군."
"여성분들은 유행에 민감하니까요."
"어떤 분을 뵈러 갈 것이네."
시드로 장군과 에바리스트는 홀을 나와 궁전으로 향했다.

별실로 안내된 에바리스트의 눈앞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다른 귀족과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여성은 황비 아리스텔리아였다.
초상화 같은 그림에서나 보던 제국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에바리스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황비는 제국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불사 황제의 황비로서, 그의 뜻을 신하와 백성에게 전할 수 있는 인물이다.
황비의 존재가 바로 절대적인 권력이라 할 수 있었다.
아리스텔리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에바리스트의 앞에 섰다.
"황비 폐하, 에바리스트·바르트 소령을 대령했습니다."
시드로 장군이 황비에게 고했다.
황비가 팔을 내밀자,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들고 황비의 손등에 입을 맞춘 후 일어섰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비 폐하."
"당신의 활약은 전해 듣고 있어요. 뛰어난 공을 세웠더군요."
"감사합니다, 폐하. 그러나 저 혼자 이루어 낸 것이 아닙니다. 부대원 모두의 공입니다."
아리스텔리아는 초상화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러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싸늘함과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
장군이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나자, 방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무슨 일로 이곳에 계시는지요?"
언제나 황족의 경호를 담당하는 카스토드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국의 궁전에 황비가 있는 것이 잘못인가요?"
천천히 에바리스트의 곁으로 다가온 황비는 에바리스트의 팔짱을 꼈다.
"긴장 좀 푸세요. 이곳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황비는 마치 에바리스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시드로 장군은 에바리스트를 황비 아리스텔리아에게 소개한 후, 두 사람에게서 물러나 만찬회장 안을 마음 내키는 대로 걷고 있다.
많은 사람이 시드로 장군의 모습을 알아보고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며 겸손을 떤다.
시드로 장군은 자신의 권세를 새삼 확인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런 와중에 확대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만찬회장에 와있던 인물이 시드로 장군에게 말을 건다.
"어이, 시드로. 그 남자, 바르트는 위험하네."
확대파에도 통제파에도 속하지 않은 베아드 장군이었다.
"그 녀석의 눈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군인의 눈이 아니야."
"그래서 더욱 이용하고 있는 거네. 그 녀석은 젊은 놈들의 상징적 존재야. 공적에 상응하는 보수만 지급해 두면 사기도 오르지. 게다가 아무리 녀석이 뛰어나다 해도 나라는 후원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네."
"예전까지는 그랬지.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
"베아드, 자네 성격처럼 소심한 의견이군. 나는 이용할 수 있는 장기 말은 모두 이용할 생각이야.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도 장기 말로 이용당할 생각은 없네."
"게다가 황비 폐하까지 소개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황비 폐하께서 몸소 요청하신 사항이네. 나도 진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네."
"시치미를 떼는 건가? 뭐, 좋네. 부디 자신의 계략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나."
"칸두 장관을 잃은 통제파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고, 확대파의 세력은 늘기만 할 뿐이네. 이 상황에서 무엇이 두렵겠나?"

만찬회가 막바지에 이르자, 일부 사람들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도 훌륭한 날이었다.
이제 제국 안에 적대 세력 따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 결판을 낼지 정하는 문제만 남았다.
시드로 장군의 기분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만찬회에서 섭취한 알코올 기운이 올라와, 마치 꿈꾸는 듯이 황홀한 기분으로 통제파의 처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밟아 버릴 것인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대상으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릴 것인가.
불리한 전선으로 보내는 것도 좋겠다는 상상에 빠져 있었다.
마중 나온 마차에 올라탄 시드로 장군은 상상에 빠져, 시종이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고, 또한 뒤쪽에 진짜 시종의 시체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챌 수 없었다.
사실, 통제파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그래서 시드로 장군 암살이라는 건곤일척의 계획을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특수한 가스가 마차 안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깨닫고 뛰쳐나오려 하지만, 마차의 문도 창문도 열리지 않는다.
시트로 장군은 곧 의식을 잃었다.
마차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이자크는 어두운 곳에 숨어서 시드로 장군에게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로부터 그렇게 명령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게 장군은 이미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통제파가 일으킨 마지막 반격의 희생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통제파의 계획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영토확장, 전선확대에 주력하는 시드로 장군은 확대파에게도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미 확대파의 주요 인물들과 사전 협의를 통해 에바리스트가 실질적인 수장을 맡기로 확정되어 있었다.

황비와 헤어진 에바리스트는 만찬회장으로 돌아왔다.
이미 손님들은 대부분 떠나고 없었다.
에바리스트는 복잡하고 미묘한 긴장을 풀기 위해 발코니에서 밤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이자크가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꽤 오래 걸렸네."
"나중에 말해줄게."
"조금 전에 시드로에게 손님이 찾아왔었어."
시드로 장군이 처리됐다는 암호였다.
드디어 자신들의 힘을 시험해 볼 때가 왔다.
에바리스트는 그렇게 확신했다.

- THE END -

R3[]

에바리스트 r3

에바리스트 r3 full

3389년 [탈출]

“아이자크…”
에바리스트는 지면에 꽂힌 목검을 뽑아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놓는다.
두 개의 목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바리스트는 옛날을 회상한다.

레지멘트의 총력을 다해 향한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최대의 소용돌이 '프로폰드'의 눈 '디 아이' 의 처치.
그 보람에 힘입어 '디 아이'는 마침내 그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심부로 향했던 레지멘트들은 아직 단 한 명도 되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느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대로라면 모두 죽어버리고 만다고!”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자크.
“초조해하지 마.”
그나마 소용동이의 눈 '디 아이' 가 사라지려 하고 있다는 것은 작전이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에바리스트는 동료들이 반드시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경험이 부족했기에 침투 멤버가 될 수는 없었지만,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벗어난 장소라고 해도 분명 위험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중심부로 향한 멤버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며 철수 경로를 확보한다.
그것이 경험이 부족한 에바리스트와 남은 멤버들의 역할이었다.

“빌어먹을! 대장들은 아직 인가?”
활발해진 요괴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동료를 기다리지만, 소용돌이 '프로폰드'의 소멸이 가까워지면서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우리도 소멸에 말려들어 버리고 만다!”
“퇴각하자!”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탈출을 시도하려 하자, 바로 직전까지 구동음을 내고 있던 부유정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쪽 부유정은 어때?”
“틀렸어. 여기도 움직이지 않아!”
그것도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에바!”
에바리스트의 사각지대에서 점점 거리를 좁혀 오던 요괴의 공격을 아이자크가 막는다.
첫 공격은 가까스로 막아 낼 수 있었지만, 다음 공격까지 완전히 받아낼 수는 없었다.
신음과 함께 오른쪽 눈을 감싸는 아이자크.
“아이자크!”
“별거 아니야. 조금 긁혔어.”
아이자크는 상의를 벗고, 임시방편으로 옷자락을 찢어 오른쪽 눈에 대지만 이내 옷감은 검붉게 물든다.
레지멘트들의 '발'이 묶인 것을 알아챈 요괴들은 수와 기세를 더해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타라!”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그러나 이곳에서는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작전현장에 나타난 적이 없는, 테크노크라트 람이었다.
“어째서 이곳에!”
노인은 에바리스트의 질문은 무시한 채 다급하게 외쳤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야기하고 있을 시간이 없네. 지금 우리에게 준비 가능한 것은 이것이 고작일세.”
두 사람은 테크노크라트가 타고 온 부유정에 뛰어오른다.
“다음은 자네들 힘으로 탈출하도록 하게! 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해내야만 하니까!”
소용돌이의 가장자리에 두 사람을 내려놓고 다시 중심부를 향해 날아간다.
떠나기 직전 람은 둘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레지멘트에는 돌아가지 말게. 몸을 숨겨.”
의도를 물어볼 틈도 없이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만이 남겨졌다.
눈 '디 아이'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마음은 서두르지만 아이자크의 발걸음은 무겁다.
“크아아아…!”
요괴에게 입은 상처가 평소의 상처와 같을 리가 없다.
여느 때라면 의무반의 치료를 받아 무사했겠지만, 이번은 그럴 수도 없다.
아이자크가 계속해서 신음을 냈다.
오른쪽 눈에서 흐르는 것은 검붉은 액체뿐만 아니라, 노란색의 액체도 섞여 있었다.
이대로 상처를 내버려둘 수는 없다.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참아. 최대한 빨리 의사에게 가보자.”
“의사인가. 의사라… 이렇게까지 악화되었는데 판데모니움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찌할 방버이 없다는 거네. 그럴 바엔 차라리…”
아이자크는 오른쪽 눈을 덮고 있던 천을 벗겨 냈다.
“어중간하게 기대해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에바?”
에바리스트의 눈에 비친 아이자크의 오른쪽 눈가는 이미 본래의 색을 잃어, 보는 이가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아이자크는 오른손을 오른쪽 눈에 집어넣으며 안구를 움켜쥔다.
숨이 끊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아이자크의 안구였던 것이 지면에 내버려진다.
“이걸로 조금은 통증으로부터 해방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아이자크는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의 얼굴에 있던 것을 밟아 뭉갰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변방을 방황하며 시간을 보냈다.
먹을 것도 스스로 구해가며, 테크노크라트 람이 말한 대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지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따.
변방의 도시에도 뉴스는 전해지고 있었다.
결국, 소용돌이는 모두 소멸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 레지멘트는 전멸했다는 것도.
레지멘트는 목숨을 걸고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 되어 있었다.
멤버들은 전부 마지막 전투에서 죽었다고.
에바리스트는 자신들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뒤에서 어떤 음모가 있었든, 자신들은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것이라고.
이상하게도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죽을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살아서 명예와 재산을 얻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세계가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 세계를 바꾸어 버리면 된다.
그런 강한 의욕만이 끓어올랐다.
단 하나의 죽음도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아남은 것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기에.

숲의 가장자리, 지평선 너머로 성곽이 보인다.
“내일 정도면 도시에 도착할 것 같다.”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는 그란데레니아 제국의 끝자락에 겨우 도착해 있었다.
“앞으로 어쩐다...”
아이자크가 물었다.
“이제 돌아갈 곳은 없어.”
“아아. 그런가.”
“이 도시는 신병을 모집하고 있어. 경력 상관 없이 말이야.”
제국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용돌이가 없어진 지금, 성채도시에 틀어박혀 있을 이유는 없다.
제국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처는 어때?”
“기다린다고 눈이 생겨날 리도 없고.”
“같이 갈래?”
“물론, 같이 가드릴게요. 도련님.”
잠시 후, 서로 웃는다. 오랜만의 웃는 얼굴이었다.

고향을 잃었을 때도, 레지멘트를 잃었을 때도, 아이자크는 항상 에바리스트의 곁에 있었다.
잔혹한 세계가 자신들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단 둘이서 싸워왔다.
그러나 세계가 자신들을 인정하려 할 때,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져 있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멈춰 선다면, 또 전부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기에.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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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리스트 r4

에바리스트 r4 full

3398년 [우상]

적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도 경계를 게을리 한 적은 없었다.
공적인 지위와 황비의 후원에 힘입은 그 권세는, 다른 이의 눈에 마치 반석 같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위험한 양날의 검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생각은 없었다.

어느 인물과 밀회를 마친 뒤 돌아오는 길.
인적이 드문 거리를 이동 중이던 에바리스트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잠시 기다려봐도 마부에게서 아무런 신호가 오지 않는다.
의아해하는 호위병이 상황을 살피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메마른 총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습격이 분명한 상황임에도 에바리스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위가 없어진 덕분에 ‘그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호위병에게 박힌 총알의 위치와 총성의 미세한 차이로 습격자와의 거리와 뱡향을 예측했다.
에바리스트는 습격자가 몇 명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차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잠시 상황을 지켜본다.
외부의 움직임은 없다.
의도적인 경고인가, 아니면 다음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호위병이 내린 것과 반대 방향의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시야에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에바리스트는 총을 봅아들고 건너편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에 도착하기 직전, 총격이 에바리스트를 덮친다.
팔에 총상을 입은 에바리스트는 비틀거리면서도 건물의 그늘진 곳으로 뛰어들어갔다.
총을 다루는 실력이 뛰어난 자였다.
그리고 상대방은 위협이 아니라, 확실히 자신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바리스트는 자신의 방심에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시간은 없다.
이쪽의 모습을 확인한 상대는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퇴로를 찾아내야만 한다.
뛰어든 곳은 복잡한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팔의 총상을 누른 채, 그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에바리스트는 붉게 물든 상처를 부여잡고 밤중의 제국 도시를 달리고 있었다.
다른 이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골목으로 들어가 벽에 등을 붙이고 귀를 기울인다.
추격의 기미는 없어 보인다. 군복과 흰색 장갑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밤하늘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눈앞의 벽에는 자신이 그려진 포스터가 붙어 있다.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해"
그 포스터에는 용감한 모습의 에바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제국 내 귀족이나 정치인의 가문이 아님에도 지금의 지위까지 올라온 에바리스트는 일부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홍보부는 그 점을 이용하여 홍보하고 있었다.
민중 사이에서 전쟁을 꺼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의 기용이었다.
"......훗."
상처의 통증을 참아내며 보이지 않는 적의 낌새를 찾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포스터에 그려진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비참한 것이었다.
그 차이에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만다.
에바리스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부하와 동료가 현재 상황을 알아채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쪽에서 연락할만한 상황도 아니다.
'이대로 몸을 숨기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할까. 아니다. 전투에서 그런 행운을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한다.'
그것이 에바리스트가 이끌어 낸 답이었다.
통제파인가, 적대국인가, 아니면 이미 파악하고 있던 확대파 세력인가.
어떤 세력인지는 모르지만, 오늘과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추격의 낌새는 아직 느껴지지 않는다.
에바리스트는 숨을 한번 고른 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던 중, 몇 안 되는 가로등 아래에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움직임에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인상적인 붉은 망토는 어두운 밤중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습격자는 통제파도 확대파도 전쟁 중인 적대국도 아니었다.
가면을 쓴 협정 심문관이었다.
"엔지니어의 앞잡이인가..."
레지멘트의 생존자인 에바리스트는 심문관이 찾아온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 꽤 늦었구나."
팔의 통증이 심해졌다. 지혈도 충분히 하지 못한 상태였다.
"......"
가면을 쓴 남자는 대답 대신 무기를 꺼내 든다.
"미안하지만,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있을 여유는 없다."
에바리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를 향해 총알을 연사했다.
그러나 상대는 양손의 칼을 흔들며 모든 총알을 막아 냈다.
보통 사람의 기술이 아니었다.
가면을 쓴 남자는 단번에 거리를 좁혀 에바리스트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에바리스트는 그 검술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총을 버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남자의 검은 공격 하나하나가 빠르고 매섭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한밤중의 거리에 울려 퍼진다.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반격에 나설 기회는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앞서 입은 상처 부위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고전의 원인은 에바리스트가 부상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지상에서 레지멘트와 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자는 같은 레지멘트 밖에 없다는 것을 에바리스트는 알고 있었다.
갑자기 가면을 쓴 남자의 공격이 멈췄다.
가면 속으로 큰 심호흡 소리가 들린다.
분명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다음 공격에서 무언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다음 공격은 조금 전까지의 공격보다 훨씬 매서워졌다.
몇 번의 검을 막아내다 팔의 떨림이 한계에 달하자, 에바리스트는 남자와의 거리를 벌렸다.
"네 녀석의 검 솜씨, 레지멘트에서 배운 것 같군. 어째서 그 녀석들의 앞잡이가 된 건가."
가면을 쓴 남자는 대답이 없다.
심리적 도발은 무시하는 듯,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에바리스트는 이 짧은 시간에 남자의 검술 패턴을 분석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기교한 검술이었지만 조합에 규칙성이 있었다.
거리를 좁혀온 뒤, 그다음에 이어진 공격은 에바리스트가 예상 한대로였다.
에바리스트의 검이 남자의 가면을 정확하게 내리쳤다.
한때 두려움의 대상이자 ‘가시나무’라 불리었던, 에바리스트의 필살기였다.
남자는 일격을 받고,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끝이다, 과거로 돌아가라."
에바리스트가 마지막 일격을 위해 치켜들었을 때, 복부에 충격이 전해졌다.
검을 치켜든 채 에바리스트는 자신의 복부에 박힌 검을 내려다본다.
가면을 쓴 남자가 팔에서 날린 칼이었다.
"큭.."
단번에 힘을 잃고 쓰러지는 에바리스트.
다행히 의식은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
일어서려고, 땅을 긁는 듯이 허우적거린다.
쓰러진 채로 옆에 떨어진 칼을 손에 쥐고 공격하려 한다.
가면을 쓴 남자는 그 칼을 에바리스트의 손과 함께 짓밟았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 과거의 망령에 죽고 만다면, 자신이 이 세계에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고 만다.
왜 자신이 여기까지 살아왔는지. 그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밟힌 손을 다친 팔로 필사적으로 빼내려고 한다.
아무리 보기 흉하다 할지라도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 강한 생각이 에바리스트를 몸부림치게 했다.
"빌어먹을, 아직이다..."
바닥에는 에바리스트의 피가 점점 번져 나가고 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가면을 쓴 남자의 표정은 알 수 없다.
마지막 순간을 눈에 기록해두려고 하는 것일까.
마치 에바리스트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큰 총성이 울렸다.
가면을 쓴 남자가 에바리스트 쪽으로 재빨리 비켜선다.
"여어, 오랜만."
에바리스트는 몽롱해져 가는 의식속에서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버릇없는 말투... 착각할 리 없다.
아이자크였다.
아이자크는 가면을 쓴 남자를 향해 소총을 겨누고 있다.
"더 할 생각인가?"
아이자크가 신호를 하자, 뒤에 있던 에바리스트의 부하들이 나타났다.
곧 날이 밝으려 하고 있었다.
가면을 쓴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무기를 내려놓고 아이자크의 반대 방향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냥 보내도 괜찮은 겁니까?"
병사 한 명이 당연한 물음을 한다.
"우선은 이쪽이 먼저다. 빨리 의무반을!"
쓰러져있는 에바리스트를 가리킨다.
"예!"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의 옆에 앉아 지혈하기 위해 천을 상처에 묶고, 머리에 손을 얹었다.
"죽지 마 에바, 여기서 끝낼 수는 없잖아."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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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리스트 r5

에바리스트 r5 full

3398년 [결말]

황비가 평소 머물고 있는 첨탑에서는 거대한 도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이 탑은 제국의 수도인 파이드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이미 밤이 깊었지만 도시는 작은 보석을 뿌린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에바리스트가 습격을 당한 지도 벌써 3개월 남짓이 지났다.
에바리스트는 이미 업무에 복귀했지만, 복귀하자마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이렇게 황비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습격 이후 처음이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밤 공기가 꽤 쌀쌀합니다."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야경을 바라보는 황비 아리스테리아의 옆 모습에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조금만 더 보고 싶어요."
아리스테리아는 야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답했다.
밤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갔다.
에바리스트는 아리스테리아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고, 그녀의 금발머리를 매만지며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폐하, 당신이셨죠? 저에 대한 정보를 건넨 사람 말입니다."
습격 당일, 에바리스트의 동향을 알고 있는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날은 아리스테리아가 주선한 구 통제파의 요인과 밀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리스테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제게 도와달라고 하셨죠.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행동이었습니까?
에바리스트는 결코 거칠게 다그치는 말투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속삭이듯이 말했을 뿐이었다.
"저에게는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말이죠."
아리스테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제가 폐하의 멍에를 풀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죠. 제 말은 결코 어설픈 치기에서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바리스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이미 늦었어요......"
아리스테리아가 그렇게 말을 흐린 순간, 충격과 폭음이 울리며 첨탑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아래를 바라보니 붉은빛이 반사되고 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자, 이쪽으로 가시죠."
에바리스트는 아리스테리아를 안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리스테리아는 에바리스트의 손을 뿌리쳤다.
"폐하, 저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여쭙겠습니다."
"이제 됐어요...... 다 끝났어요."
아리스테리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황비의 말이 맞다. 다 끝났어, 에바리스트."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발코니 입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붉은 옷을 걸친 협정심문관 브레이즈가 나타났다.
에바리스트는 아리스테리아를 감싸듯이 서서 위치를 바꾸고 검을 뽑았다.
그는 특별히 황궁 내에서도 검을 소지할 수 있었다.
"탑에 불을 낸 것이 네놈이냐?"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황비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점 같은데?"
브레이즈의 시선이 아리스테리아에게로 향하고 있다.
에바리스트도 옆눈으로 아리스테리아를 살폈다.
그곳에는 발코니 난간에 서 있는 아리스테리아가 있었다.
"폐하, 그만두십시오."
에바리스트는 브레이즈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도, 아리스테리아를 만류하듯 한쪽 팔을 뻗었다.
"에바리스트, 안녕히.."
아리스테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난간에서 몸을 던졌다.
에바리스트는 떨어지는 아리스테리아를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를 향한 브레이즈의 살기가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둔탁하고 침울한 충격음이 발코니에 들려왔다.
"호오, 역시 황비를 버렸군."
세계를 구하기 위해 함께 레지멘트에서 싸웠던 성기사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에바리스트도 심문관이 레지멘트 생존자를 처치하러 돌아다닌다는 소문은 들은 바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네놈 때문 아니냐!"
"글쎄, 그것은 네 입장에서 내린 결론 같군.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네가 황비를 돕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정을 내린 건 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평상시의 에바리스트답지 않게 말투에 살기가 가득 찼다.
"너는 무자비한 남자다, 에바리스트. 너에게는 마음이란 게 없어. 그리고 너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지."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나 대신에 누가 살아주기라도 한다는 거냐?"
"이해득실만 챙기는 너에게 어울리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브레이즈는 다부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약해빠진 네놈에게 내가 진다고?"
에바리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브레이즈에게 날카로운 일격을 가했다.
브레이즈는 냉정하게 그 일격을 후려치고 간격을 유지했다.
두 사람 모두 방에 있었다.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에바리스트는 브레이즈의 도발에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결코 기선을 제압하는 스타일의 싸움은 하지 않았다.
"아리스테리아가 죽을 필요는 없었잖아. 이건 나와 네놈 간의 문제다!"
방안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려왔다.

"이제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황제께서 스스로 부활할 것을 결정했지. 나는 지금 황제의 명을 받아 이곳에 온 것이다."
브레이즈는 가볍게 에바리스트의 검을 받아넘겼다.
"엔지니어, 그다음엔 황제인가? 하찮은 녀석다운 행동이군."
다시 물러나듯이 두 사람은 간격을 유지했다.
황비가 거주하는 호화로운 거실은 두 사람이 싸울 공간으로 충분하다.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고 움직인다.
"불사 황제나 판데모니움의 입장에서, 너 따위는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아."
에바리스트는 브레이즈의 오만한 도발에 넘어가고 있다.
"그런 하찮은 상대에 고전하고 있는 넌 뭐냐?"
두 번, 세 번 에바리스트의 칼이 브레이즈를 덮친다.
하지만 브레이즈는 이 모두를 받아넘긴다.
"훗, 그것은 자만심이다. 너는 약해졌다. 그리고 나는 강해졌지."
브레이즈가 특수한 자세에서 일격을 가했고, 그 칼끝이 에바리스트의 어깻죽지를 질렀다.
에바리스트의 몸에 고통이 퍼지기 시작했다.
에바리스트는 고통에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만다.
"너는 테러리스트에 의해 황비와 함께 살해당했다고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실의에 빠진 국민은 부활한 불사 황제를 열광적으로 맞이하겠지. 꽤 괜찮은 시나리오 아냐?"
브레이즈는 그렇게 말하며 다음 공격자세를 취했다.
"그런 뻔한 연극, 그냥 내버려 둘 줄 아나?"
"너로서는 과분한 역할이라고 생각해라."
브레이즈가 다가오자, 에바리스트는 일어섬과 동시에 맞받아쳤다.
'가시나무'라 칭하는 검기술이었다.
"그 정도 기술에 내가 당할 줄 아느냐!"
브레이즈의 모습이 환영과 같이 자취를 감췄고, 에바리스트의 반격은 허공을 그었다.
'가시나무'의 공격이 끝나자, 브레이즈의 찌르기가 덮쳐왔다.
에바리스트의 오른쪽 가슴이 관통당했다.
브레이즈가 검을 뽑아내자 에바리스트는 털썩 쓰러졌다.
브레이즈가 천정을 보고 쓰러진 에바리스트를 끝장내기 위해 천천히 다가간다.
"이것도 옛정이다. 편하게 보내주마."
브레이즈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목 언저리에서도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피했다고 생각했던 '가시나무'의 기술이 브레이즈의 목을 찌를 뻔한 것이다.
브레이즈는 피를 닦고 치명상이 아님을 확인한다.
에바리스트의 폐는 피로 가득 채워져 간다.
가슴이 심하게 헐떡였다.
떨어진 검을 찾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있다.
브레이즈는 칼날을 안쪽으로 들고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듯 높이 쳐들었다.
그때, 열풍과 함께 문이 열리면서 두 발의 총탄이 브레이즈를 덮쳤다.
브레이즈는 재빨리 물러나 총탄을 피했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아이자크였다.

문 저편은 이미 연기가 가득 차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불길은 금방이라도 방으로 침입할 기세였다.
아이자크는 곧바로 물러난 브레이즈를 향해 양손에 든 권총으로 연사를 퍼부었다.
브레이즈는 검을 재빠르게 휘둘러 탄환을 튕겨냈다.
하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몇 발이 브레이즈의 몸에 맞았다.
그러나 갑옷의 방어 효과 덕분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으음, 한 방에 해치울 수 있게 되었군. 충견의 행차인가."
"브레이즈, 잠깐 못 본 사이에 출세한 모양이로군. 겉모습만은 훌륭하구나."
아이자크는 탄환을 다 써버린 권총은 던져버리고 검을 뽑았다.
아이자크의 모습은 불 속을 빠져나와서였는지 몹시 그을려 있다.
잘 보면 군데군데 피도 흐르고 있다.
"맥스를 뿌리치다니 대단하군."
"그따위 가면 쓴 녀석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그런 말 하는 것치고는 부상이 꽤 심한 것 같은데?"
브레이즈는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장기전으로 가봤자 득이 될 것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아이자크는 보기에도 상당히 지쳐있었다.
몸을 회전시켜 검을 후려치듯이 돌려 아이자크의 복부에 날카로운 일격을 선사했다.
아이자크는 브레이즈의 공격을 받아냈지만, 미처 다 막지 못한 검 끝이 복부에 파고들어 왔다.
"여전히 허세뿐이구나."
"......흥, 간지럽지도 않다."
아이자크는 순간적으로 발밑을 휘청거렸지만, 검에 담긴 기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브레이즈는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끈질긴 녀석."
"정말 끝까지 짜증 나는군......"
아이자크의 숨은 점점 차오르고 있어 바로 반격할 만한 힘은 없다.
역시 맥스와의 싸움에서 힘을 다 쓴 것으로 브레이즈는 판단했다.
브레이즈는 검 하단을 잡고 한 발 한 발 간격을 쟀다.
이번에는 아이자크의 초조함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죽어가는 에바리스트를 돕고 싶은 것이다.
아이자크가 높고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검을 들어 올려 브레이즈에게 덤벼들었다.
브레이즈가 그 칼끝을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피하고 곧바로 아이자크와 자리를 바꾸듯 이동해 온 힘을 다해서 아이자크를 찔렀다.
아이자크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굴렀다.
브레이즈는 달려들어서 아이자크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자크는 몸을 굴려서 브레이즈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중심을 제압당한 충격 때문에 브레이즈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브레이즈가 다시 자세를 잡으려고 몸을 비틀어 착지한 그 순간, 아이자크의 검이 브레이즈의 목을 찔렀다.
브레이즈는 그 칼을 받아넘기려 했지만 아이자크의 혼이 담긴 일격에 압도당했다.
아이자크의 검은 브레이즈의 목등뼈에 꽂히듯이 멈췄다.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브레이즈의 동맥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고, 그 주변은 붉은 안개로 자욱해졌다.
아이자크는 검을 떨어뜨리고 휘청휘청 움직이는 브레이즈를 보았다.
브레이즈는 솟아나는 피를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뿜어져 나오는 피는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져 흐를 뿐이었다.
브레이즈는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그대로 눈을 감고 자신이 흘린 피 웅덩이 위에 쓰러졌다.
아이자크는 그 피 웅덩이 때문에 미끄러지면서도 서둘러 에바리스트 옆으로 달려갔다.
에바리스트도 역시 자신이 흘린 피에 헐떡이고 있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지만, 입가에서도, 가슴의 상처에서도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이자크는 자신의 양손으로 에바리스트의 손을 꼭 잡았다.
"반드시 살려줄게. 걱정하지 마."
"......이제 됐어."
에바리스트는 피가 넘쳐나는 입으로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웃기지 마! 이런 건 별거 아니라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돼!"
에바리스트는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너답지 않다고, 에바......"
에바리스트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이자크가 처음으로 보는 에바리스트의 눈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왔지만, 그의 눈물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그리고 침착하게 주위를 이끌어가는 모습.
그것이 아이자크가 알고 있는 에바리스트라는 남자였다.
"그만두라니까......"
아이자크는 당황했다.
이제 에바리스트가 살 수 없다는 것도, 에바리스트의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각오가 되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바리스트는 다시 한 번 눈을 뜨고는 아이자크가 꼭 잡은 손을 자신의 가슴에 끌어당기듯이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은 후,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THE END-

에피소드 카드[]

EP1[]

에바리스트 ep1

에바리스트 ep1 full

3389년 [각오]

몇 구의 시체를 보았다.
뇌수에 구멍이 뚫린 자, 사지가 갈가리 찢긴 자, 혹은 산성 액체에 온몸이 녹아버린 자...
그리고 또다시 오늘도...
이젠 더 이상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는 언제부턴가 그 광경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차가운 시선으로 죽은 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용돌이」 내부에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미 완성되어 자리 잡은 개념 따윈 통용되지 않았다.
레지멘트에 입대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에바리스트는 자신의 몸과 머릿속에 그 사실을 철저하게 주입해 두었다.
항상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항상 명료한 사고를 유지하기 위해서...

에바리스트는 자욱하게 퍼져있는 화약 냄새 속에서 무언가가 썩는 악취를 느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적의 촉수가 다가와 발을 잡아당겼다.
다리가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지만, 에바리스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촉수가 뻗어 나온 곳에는 썩은 파리와 문어가 뒤섞인 듯한 괴물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랬군. 네 녀석이 썩은 악취를 풍기는 원인이었나?"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주위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에바리스트에게는 그렇게 느껴지고 있었지만, 케이오시움의 영향으로 인해 발현한 레지멘트 전사들이 지닌 특유의 힘이 발동된 것이었다.
그렇게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침착하게 적을 바라보았다.
적을 살펴본 결과, 괴물의 가슴팍에 고동치는 돌기 같은 물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권총집에서 총을 꺼내 돌기를 겨냥하고 정밀 사격을 실시했다.
탄환이 발사되는 것과 동시에 주위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괴물이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촉수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괴물의 목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순간,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에바! 괜찮냐!?"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아이자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별 문제 없어."
"제길, 꽤 많은 인원이 당해버린 모양이군."
"..그런 것 같네."
주위를 둘러보니 두 사람 근처에는 많은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레지멘트의 동료였던 사람들이었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소용돌이의 수와 규모가 예전보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잦은 전투를 치러야만 했던 레지멘트의 전투력과 사기는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지치고 쇠약해져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레지멘트 상층부가 빠른 시일 안에 「디 아이」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도 전혀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적들은 대충 정리된 것 같네."
"그래, 이제 대장님들이 코어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 순간, 에바리스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썩은 악취가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느껴지고 있었다.
"아이자크! 위험해!"
에바리스트가 아이자크를 떠밀었다.
익숙함, 방심, 과신... 원인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지만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방금 전에 쓰러트린 괴물이 아직 살아있던 것이었다.
괴물의 촉수가 아이자크를 덮치려고 하고 있었다.
"좀 전에는 죽은 척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를 감싸려다가 또다시 괴물의 촉수에 붙잡히고 말았다.
"에바!"
아이자크가 에바리스트를 구하기 위한 시도를 해봤지만 다른 촉수의 공격을 받아 튕겨나가고 말았다.
에바리스트가 괴물에게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괴물은 에바리스트가 어떻게 나올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총을 든 팔도 촉수에 휘감겼다.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행동이었다.
"칫...!"
이번에는 목을 향해 촉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괴물은 촉수를 이용해서 에바리스트의 목을 그대로 졸라버릴 심산인 것 같았다.
에바리스트는 이런 상황에서 실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모색했다.
성기사의 힘은 몇 번이나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간힘을 쓴 결과, 왼쪽 팔의 자유를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 손에 쥐고 있던 것은...

- 우리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끝내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가 에바리스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각오가 필요하다. -
그래, 각오라면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끝내기 위한 각오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애당초 3년 전 어느 날, 「소용돌이」가 고향을 집어삼킨 그 날, 이미 자신은 죽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지만 살아남은 목숨 따윈 얼마든지,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 에바리스트에게 「각오」라는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에바리스트의 손 끝에는 수류탄이 쥐어져 있었다.
‘적어도 네 녀석만은 저승 가는 길동무로 데리고 가주마.’
그런 생각과 함께 수류탄을 힘껏 움켜쥐었다.
"에바! 기다려!!"
멀리서 아이자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에바리스트는 지금의 이 광경 또한 전장에서 자주 보게 되는 흔한 광경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죽음 따위는 그다지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죽음은 어디에나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에바리스트가 수류탄의 핀을 뽑으려고 한 순간, 땅울림처럼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촉수 괴물이 녹색 피를 뿜어내면서 두 동강으로 갈라졌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에바리스트가 바라본 곳에는 거대한 검을 들고 있는 베른하드가 서 있었다.
"코어는 탈취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 귀환하자."

또다시 살아남았다.
기지로 귀환한 후, 에바리스트는 조금 전까지 「소용돌이」에서 벌어지던 작전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았다.
그 위기는 자신들의 실수가 초래한 결과였고, 그로 인해 죽음이 눈 앞으로 다가왔었다.
분명히 그런 상황과 마주쳤었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 순간, 에바리스트는 갑자기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세면장으로 뛰어갔다.
먹은 게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위액만 토해냈다.
한바탕 구역질을 끝내고 거울을 보니, 거울 속에는 낯익은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안색이 나쁘군."
세면장에서 나오니 베른하드가 서 있었다.
"...대장님."
"이번 작전에서는 상당히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네."
"아이자크에게 들었다. 너도 위험했었다고 하더구나."
"그건... 적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던 저의 판단 미스입니다."
"네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인데."
"앞으로는 더욱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

베른하드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에바리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너는 아직 젊다."
"그 말씀은..."
"그래. 내가 예전에 선배들에게 들었던 말이지."
"네. 그 이야기는 전에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말을 이번에는 내가 써먹어야겠다. 너는 아직 젊다. 서둘러 죽으려 하지 말거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럴 리 없을 텐데."
"..."
두 사람의 사이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에바리스트가 그 침묵을 깨트렸다.
"..전에 대장님께서 저에게 각오는 되어 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끝낼 각오는 되어 있냐고."
"..."
"각오라면 되어 있습니다. 싸움을 끝내겠다는 각오 말입니다. 살아남는 일 따윈 바라지 않습니다."
에바리스트의 뇌리에 고향을 집어삼킨 「소용돌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소용돌이」를 이 세계에서 소멸시키겠다.
그 일이, 그 일만이 에바리스트 뿐만 아니라 레지멘트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적,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대장님께선 이번에는 젊다는 이유로 죽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순되는 거 아닙니까?"
"모순이라... 그렇군. 확실히 네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싸움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네?"
"이 싸움은 언젠가 끝이 난다. 아니 끝낼 것이다. 에바리스트, 너는 「소용돌이」가 소멸된 후에는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지?"
"..."
에바리스트는 베른하드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아무래도 손님이 온 모양이군."
베른하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낀 아이자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자크... 다리는 괜찮아?"
에바리스트가 말을 걸었지만 아이자크는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듯이 에바리스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아이자크, 무슨 짓을...!"
의표를 찔려 당황한 에바리스트에게 아이자크가 분노로 가득 찬 고함을 질렀다.
"에바, 너 이 자식. 간단히 죽으려 들지 말란 말이야!"
"...!"
"죽음을 맞이한 녀석들은 좀 더 발버둥을 치며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라도 했었잖아! 게다가 그곳엔 나도 있었어! 그렇게 간단히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어쩌라는 거야!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지 말라고!"
아이자크의 눈에는 어느 틈엔가 눈물이 고여있었다.
"..아이자크."
"잘 들어, 지금은 아직 네가 죽어야 할 때가 아니야."
그래, 그랬다.
3년 전에 고향이 사라진 그 날, 에바리스트의 곁에는 아이자크가 있었다.
그곳에는 죽음만이 존재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삶에 얽매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싸움의, 「소용돌이」의 마지막을 지켜볼 때까지는...
"미안하다. 아이자크, 네가 말한 대로다."
아이자크가 그렇게 대답하는 에바리스트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알면 됐어."
아이자크는 그렇게 말한 후, 에바리스트의 멱살을 잡고 있던 힘을 풀었다.
"근데 그렇게 부상을 당한 몸으로 용케도 그렇게 고함을 질러대는구나."
에바리스트가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시끄러워!"

뒤를 돌아보니 베른하드는 사라지고 없었다.
- 에바리스트, 너는 「소용돌이」가 소멸된 후에는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지? -
그 질문만이 에바리스트의 머릿속에서 조용히 울러 펴지고 있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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