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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그룬왈드의 스토리.

연표편집

3392년 [외로운 그림자]
3392년 [사지]
3393년 [전장과 피]
3394년 [죽음의 군대]
3394년 [벌레]

레어 카드편집

R1편집

그룬왈드 r1

그룬왈드 r1 full

3392년 [외로운 그림자]

- 론즈브라우 왕국 시내 -
여자가 차가운 석조 바닥 위에서 죽어 있었다.
여자는 어깨에서 가슴 한가운데까지 깊게 베어져 있다.
피는 석조 바닥 위를 지나 갓길까지 흘러 내리고 있었다.
옆에 서있는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창백한 얼굴의 입가에 번진 피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매우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동안 그 곳에 서 있었다.
검은 외투와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거리의 시간은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달빛은 없었다.
이윽고, 검은 옷의 남자는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브론하이드 성 -
"그래서?"
왕자의 말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옥좌에 앉은 그룬왈드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수도 안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신하와 백성들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제발 더 이상은…”
대대로 왕실을 섬겼던 충신인 가이우스경이 말을 잇지 못한다.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론즈브라우 왕국에서는 병상에 있는 늙은 왕을 대신하여, 젊은 왕자인 그룬왈드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가신들이 권력의 주인인 왕자에게 수도 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원래 왕국에는 그룬왈드 이외에도 왕위 계승자에 해당하는 형이 두 명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룬왈드는 왕의 노여움을 사 추방당했었지만 몇 년 전에 돌아왔다.
추방을 당했던 이유도 그룬왈드의 기괴한 행동과 성격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의 사체를 모아 땅에 묻거나 뼈를 발라내어 방에 장식했었다.
사형당한 죄수의 시체를 갖고 싶어하기도 했었다.
유모들은 그런 왕자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수군대며 아무도 그의 시중을 들려 하지 않았다.
형이나 왕이 그 행동에 대해 혼을 내도 기괴한 행동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열네 살 때, 성의 지하실에서 그가 죽인 것으로 보이는 시체가 수십 구나 발견되어 왕국에서 추방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반드시 국왕전하께 보고 드릴 것입니다."
가이우스는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로 왕자에게 말했다.
가이우스는 체념하고 있었다. 이 왕자는 추방당하던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추방당할 당시, 왕은 몇 번이나 그룬왈드에게 물었다.
왜 죽인 것인지, 어째서 이런 짓을 했는지 물었다.
그 때도 전혀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왕은 절망하여 그를 추방했던 것이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긴박한 상황에서 사이에 끼어든 것은 궁전에서 학자로 오랜 기간 종사해온 로휀이라는 남자였다.
여든이 넘은 앙상한 몰골의 노인이었지만, 눈빛만은 서방에 이름을 떨친 공학사였던 때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저희 가신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부디 무분별한 짓을 삼가 달라는 말씀입니다."
선선대의 왕 때부터 왕을 모셔왔던 노인은 다른 가신과는 다른 말투가 허용되고 있었다.
"그란데레니아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문은 이곳에도 자자합니다.
전란의 때가 멀지 않았다고 나라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입니다. 세계는 혼돈의 멍에에서 해방되었고, 각 나라들은 지상의 영토싸움을 재개하기 위해서 군사정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전란에 우리 왕국도 반드시 말려들게 될 것입니다."
로휀은 잠시 숨을 돌리고 가신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나라를 생각하는 가신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늙은 가신의 말을 듣고도 변함없는 왕자의 모습을 보다 못한 가이우스경과 다른 가신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옥좌 앞에서 물러났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로휀은 혼잣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선과 악, 밝은 태양의 아래서는 알기 쉬워서 좋을 텐데."

- 암흑의 길 -
그룬왈드는 성을 빠져 나와, 자정이 지난 깊은 밤에 성 아래쪽의 거리로 나왔다.
이 성에는 그룬왈드밖에 모르는 샛길이 많이 있었다.
그는 이 오래된 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고독했던 그에게는 오래된 성의 숨겨진 통로와 지하 감옥이 어느 곳보다도 편안한 장소였다.
밤의 축축한 공기가 폐로 들어오자 그룬왈드는 그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잠시 눈을 감고 욕망의 맛을 음미한 후, 외투의 후드를 뒤집어 썼다.
술집과 홍등가가 모여 있는 대로까지 나와 골목의 후미진 벽에 기대서서 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술에 취한 매춘부 일행이 그의 앞을 지나간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룬왈드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집에서 나온 여자가 대로변에서 벗어나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룬왈드도 천천히 그녀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사람들이 붐비던 대로에서 벗어나 가로등도 별로 없는 골목길로 걸어갔다.
골목을 걷고 있는 여자에게 검은 그림자가 다가간다. 여자는 아직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림자가 여자 뒤에 다다르려는 찰나, 그림자와 그림자가 부딪쳤다. 검이 바닥에 떨어진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 갔다. 서 있는 것은 검을 빼어 든 그룬왈드.
여자를 덮치려 했던 남자는 두 번째 공격을 피하려고 거리를 벌렸다.
남자의 체격은 검은 왕자와 매우 닮아있었다.
"널 찾아 다녔어."
남자는 상대가 왕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자세를 잡은 남자는 윗옷의 단추를 풀려고 하고 있었다.
체격이나 자세로 미루어보아 남자가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뽑기 전에 생각해봐."
그룬왈드가 기선을 제압하듯이 말을 내뱉었다.
"너는 무엇을 원하나?"
남자는 왕자의 이상한 질문을 무시하고 상의를 들어 올리며 총을 뽑는다.
한 줄기 섬광이 지나간 후 남자의 목은 깨끗이 잘려 떨어졌다.
남자의 몸이 총을 쥔 채로 쓰러진다. 선혈이 바닥을 적신다.
한 순간 그룬왈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밤 거리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룬왈드는 남자의 목을 상의로 감싸 들고 일어섰다.

- 지하실 -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룬왈드는 힘차게 그 문을 연다.
그곳에는 기묘한 기계에 둘러싸인 채 앉아있는 로휀의 모습이 보였다.
늙은 현자는 거대한 돋보기를 들여다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왕자 전하, 갑작스러운 방문이시군요."
"이 녀석에게 듣고 싶은 것이 있어."
그룬왈드는 이상한 장치와 가죽으로 감싸인 오래된 책으로 어질러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목을 올려 놓았다.
"오랜만이군요. 다시 그 일을 하시는 건가요."
로휀의 눈에 섬뜩한 생기가 깃들었다.
"이건 너의 실험대상이 아니다. 이 놈은 성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의 범인이다."
"호오. 그렇군요. 그 일은 당신이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이군요. 이것 참 의외인데요."
노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쓸데없는 농담은 집어치워. 머리가 썩어버린다고."
"말씀 안 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디에 넣어 두었더라……"
로휀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책과 이상한 기계가 늘어선 방을 헤치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룬왈드는 선반으로 변해버린 긴 의자에 있던 잡동사니를 치워버리고 앉았다.
그리곤 사건의 진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 THE END -

R2편집

그룬왈드 r2

그룬왈드 r2 full

3392년 [사지]

지하실.
론즈브라우 왕국 성 아래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연쇄 살인범의 머리는, 여러 가닥의 실처럼 보이는 물건으로 기묘한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기계는 조금 전까지 작동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먼 옛날, 엔지니어의 기술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볼 수 있는 기계.
머리만 존재한다면 죽은 사람에게도 사용이 가능한 물건이었지만, 이런 물건을 남몰래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지상에서는 아마도 로휀 뿐일 것이다.
"쓸모없는 기계군. 정말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기계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저처럼 볼품없고 낡아빠진 물건이지만 기능은 뛰어납니다."
왕자는 노인의 가벼운 농담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 본인도 모르는 사실을 끄집어낼 수는 없지요. 배후에 있는 자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살인범의 머리와 머리를 자를 때 뿜어져 나온 피를 뒤집어쓴 된 남자, 그리고 노인.
괴이한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는 어쩐지 즐기는 듯한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다.
"옷과 돈을 건네주며 무차별 살인을 의뢰한다. 기묘한 이야기군."
"취미로 살인을 즐기는 자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기묘하지도 않지요."
왕자는 이번에도 로휀의 농담을 무시했다.
"그런데 이 옷은 전하의 옷으로 오해할 만 하군요."
로휀이 머리를 숨기는 데 사용한 범인의 상의를 펼쳐 자세히 살펴본다.
피 때문에 더러워지긴 했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옷의 상태가 아니다.
"똑같아. 내 옷과 같은 옷이야."
가신들을 비롯한 신하와 백성들의 평가는 둘째치고 한 나라의 왕자가 입는 의상이다.
그렇게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물론 가격 또한 그에 걸맞게 비싸다.
"이 일의 의뢰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짐작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글쎄. 너무 많아서 모르겠군."
그룬왈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다음 날, 성 안에서 이동 중인 가이우스를 비롯한 가신단을 발견한 그룬왈드는 그들을 불러 세운 후, 상의로 감싼 살인범의 머리를 가신단의 발밑으로 내던졌다.
썩기 시작한 살임범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주위에 악취가 진동한다.
"히익!"
가신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다른 이들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악취에 얼굴을 찌푸린다.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처리했다. 이제 성 아래 마을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전하도록 해라."
"전하께서 몸소 찾아내신 것입니까? 이것은......"
가이우스 경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텐데?"
"송구하옵니다. 전하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처벌을 내리신다면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가이우스는 왕자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다른 가신들의 표정에도 그룬왈드를 적대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느낌은 없었다.
자신들도 이렇게 목이 잘리게 되는 건 아닐지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겠다. 대신에 그 머리를 너에게 주지. 장식해 둬."
왕자는 어이없어하는 가신단을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가신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지하실에 들어가자마자 로휀이 말을 걸었다.
"아무 말도 못 하더군."
"뭐,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누구의 사주이든 전하가 눈에 거슬려서 견딜 수 없나 봅니다."
"내가 없어지기만 한다면, 그걸로 좋을 테지."
"뭐, 그런 거지요."
"이런 시시하고 뻔한 연극이 이어진다면, 왕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전하에게 어울리는 일, 아니, 왕족의 의무가 곧 다가올 겁니다."

며칠 뒤, 왕국으로 루비오나 연합 왕국의 특사가 찾아왔다.
루비오나로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러 온 것이다.
가신단이 소집되어 왕자 앞에서 회의하고 있다.
"그란데레니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네. 마침내 루비오나쪽으로도 진군한다는 정보를 손에 넣은 듯합니다."
"루비오나가 무너진다면, 우리 왕국도 무사할 리 없을 것입니다. 루비오나와는 예전부터 동맹국이기도 합니다."
"우리 왕국도 이미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일정 규모의 파병 준비는 1주일만 있으면 형태가 갖춰질 것입니다."
"우선 선발대를......"
그룬왈드는 옥좌에 앉아 가신단이 진행하는 회의의 상황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선발대에는 나도 참가하겠다."
회의 중에 왕자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국왕 폐하가 병상에 계신 이 상황에 전하가 전장에 가신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주변의 신하가 간언하려 하지만 로휀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전하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소 국난에 맞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전하를 보내드립시다."
가신단은 침묵을 지켰다.
"가이우스. 내가 없는 동안 부탁하네."
왕자는 로휀의 제안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가이우스 경에게 말을 하고 옥좌에서 일어났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가이우스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병사의 소집에는 5일이 걸렸다.
왕국 내에서 소집된 병사들이 대열을 이루며 늘어선다.
원정군으로서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다.
"그란데레니아 제국은 루비오나 연합왕국 침공을 개시하여 세계에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오랜 동맹국인 루비오나를 내버려둘 수는 없다! 우리 론즈브라우 왕국도 루비오나 연합왕국과 함께 제국을 물리치자!"
"제국에 죽음을! 제국에 죽음을! 제국에 죽음을!"
소리치는 군단장에 호응하여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으로 답했다.
그룬왈드는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로휀은 출병식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전하의 힘을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줍시다."

- THE END -

R3편집

그룬왈드 r3

그룬왈드 r3 full

3393년 [전장과 피]

그룬왈드가 마지막 남은 제국 병사를 향해 칼을 치켜든다.
“항복! 포로가 되겠어! 죽…죽고 싶지 않…”
양손을 들고 목숨을 구걸하던 제국 병사는 하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다시금 칼을 휘둘러 묻어있던 피를 날린 뒤 칼집에 넣는다.
그날의 승리는 완승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론즈브라우 왕국군은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도 그란데레니아 제국의 침공을 막아 내며 선전하고 있었다.

루비오나 왕국의 국경에 진을 친지 수개월째.
그룬왈드가 이끄는 부대는 개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영토 확대 의지를 굽히지 않는 그란데레니아 제국은 전쟁을 멈추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론즈브라우-루비오나 연합군에게는 아직 그란데레니아 제국을 이길 정도의 군사력은 없었기에, 그 전력은 서서히 그리고 명백히 줄어들고 있었다.

"기다려주십시오. 오늘도 전선에 나갈 생각이십니까?”
참모총장이 필사적으로 그룬왈드에게 간언한다.
"......"
묵묵히 무기 손질을 계속하는 그룬왈드.
전쟁터에 도착한 후 몇 번이나 반복된 상황이었다.
"부디 옥체를 보전하십시오. 계속해서 승리하고 있다고는 하나, 제국의 힘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왕자님께서는 론즈브라우의 총대장이십니다. 진지 안에서 지켜봐 주십시오. 혹여나 왕자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국왕 폐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몇 번이나 같은 충고를 들은 그룬왈드였지만, 생각이 바뀌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내 검은 피를 원하고 있다. 피를.. 그것도 아주 많은 피를 말이지.”
검의 상태를 살피며 기분 나쁘게 중얼거리는 검은 왕자의 모습에 참모총장은 공포를 느꼈다.
"본국으로부터의 병력과 물자 보급은 충분한가?”
참모총장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만, 잠시 후 그 의도를 알게 되자 더욱 공포에 떨게 되었다.
"...... 아니오. 그다지 잘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요구대로 공급되던 병력과 물자가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무언가 이유를 달아가며 지연, 감소시키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하찮은 일들에 대해 보고받을 리 없는 그룬왈드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었다.
"표적이 되기 쉬운 내가 앞에 서면 병력의 소모도 줄게 되어있다."
몇 번이나 전선에 나서 공적을 올려온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아니면 보고를 게을리 한 죄를 추궁 당하고 싶은가?"
"부디 터무니없는 일은 삼가 주시기를……"
참모총장은 체념했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룬왈드에 백기를 들었다.
"생각해보지."
그룬왈드는 짧게 말한 뒤 말이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론즈브라우 일보 -
"그란데레니아 제국군 두려움에 도망치기 바빠!"
"연승무패 왕국군!"
"건투! 루비오나군!"

성내에서 발행된 신문을 읽은 신민들은 저마다 왕자의 활약상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오늘도 꽤 기분 좋은 일들만 쓰여 있구먼."
"적군의 절반은 항상 왕자가 혼자 해치우고 있다는 것 같더군."
"이봐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건 한창때 일에 불과하잖아."
"어쨌든 꽤 큰 활약을 보이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아."
"지금은 두 왕자가 모두 죽긴 했지만, 그 섬뜩한 흑태자가 돌아온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어떻게 될지 걱정했었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신의 뜻이라는 건 정말로 존재하는 모양이야."
"이 기세라면 우리 왕국은 걱정 없겠군."
"전승 축하 기념으로 세금도 내려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하하, 그럴 일은 없지 않겠나."
신문을 안주 삼아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신민들.
전쟁터는 멀리 떨어져 있고, 승전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에 성내의 분위기는 밝았다.

그에 반해 가신단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한 사람이 종이 뭉치를 꺼내 책상 위에 펼친다.
"보십시오. 신민들에게 흑태자라 불렸던 두려움의 대상의 평판이 지금 보시는 이와 같습니다."
론즈브라우 일보를 비롯한 지역의 신문에는 온통 왕국군의 승리와 왕자에 관한 기사뿐이었다.
가신단은 하나같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렇게 돼서야 무엇을 위해 병력과 물자 보급을 최소화해 온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게 아닙니까."
"패배의 책임을 왕자에게 덮어 씌워 실권을 빼앗자는 계획이 이 모양입니다."
"만약 이대로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우리의 입장, 아니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이미 계획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가이우스경!"
모두 가이우스를 바라본다. 그는 가신단 내에서도 지위가 가장 높은 자였다.
국정에서 왕자를 배제하자고 계획을 세운 이도 그였다.
"아마도 왕자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우리의 생각대로 될 것입니다."

아군 이외에는 서 있는 이 없는 전장에는 쓰러진 적군 병사를 때리는 검의 둔탁한 소리만이 울린다.
"왕자님"
가슴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손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두개골을 때려 부순다.
그룬왈드는 쓰러진 적군 병사의 시체를 잘게 자르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왕자님!"
그것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적군을 확인 사살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룬왈드는 인체가 분리되는 ‘소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칼끝으로 전해지는 충격도, 흩날리는 살점도 그룬왈드를 기분 좋게 만든다.
삶에서 죽음으로 되돌릴 수 없는 변화, 그것을 자유롭게 하는 감각이야말로 그의 희망이었다.
마음이 진정으로 열리는 순간이었다.
군단장의 세 번이나 거듭된 요청으로 간신히 둔탁한 소리는 그쳤다.
"더는 이곳에 싸울 상대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진지로 퇴각하시지요."
"...... 알았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룬왈드는 군단장이 준비한 말에 올라탄다.
총대장으로서 누구보다 맨 앞에 서고, 그 누구보다 공을 세웠음에도 그룬왈드의 마음은 더욱 굶주리고 있었다.
왕자는 자신의 어두운 욕망에 완전히 삼켜져 버렸다.

- THE END -

R4편집

그룬왈드 r4

그룬왈드 r4 full

3394년 [죽음의 군대]

새벽이 오기도 전.
검은 베일을 한 꺼풀씩 벗기듯 하늘이 밝아지고 있다.
보통 때라면 새와 벌레가 일어나 곧 떠오를 아침 해를 맞이하며 노래를 부를 시간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대신에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많은 사람의 술렁거림이 지배하고 있었다.
원군으로서 론즈브라우군을 이끄는 그룬왈드는 홀로 진지에서 벗어나 조용히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트레이드 영구요새.
지금 그룬왈드의 부대가 배치된 요새의 이름이다.
예전부터 루비오나 왕국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맹위를 떨쳤던 곳이다.
지금까지 제국군에게 여러 번의 고배를 선사해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이곳에 줄지어 서 있는 장병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확신했다.
새벽녘의 빛에 비친 병사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고, 그중에는 소리 내 웃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굉음 때문에 사라졌다.

구우우웅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전함 갈레온이 굉음을 울리자, 잠시 후 왕국군 진지에 폭발이 일어났다.
직접 포격을 당한 병사들은 인형처럼 날아가 버렸고, 살아남은 자들도 공포에 휩싸여 진지는 혼란에 빠졌다.
거기에 제국병이 결사적으로 돌격해왔다.
떨고 있던 왕국병의 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줄어들었다.
압도적인 모습을 갖춘 제국의 신무기는 여러 소국가의 연합체인 왕국군의 의사소통과 통솔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전하, 이대로는 우리 군도 막대한 피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룬왈드 곁으로 부대장이 달려왔다.
론즈브라우군은 직접적인 포화를 당하지 않아 잘 통제되고 있었지만, 병사들 사이에는 공포와 불안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전군에는 후퇴를 지시하라. 저 괴물에서 떨어져 기회를 엿보도록 한다."
"아, 알겠습니다!"
부대장이 굳은 얼굴로 달려가는 것을 본 후, 그룬왈드는 전방에 늘어서 있는 부대를 바라보았다.
혼란에 빠진 군단 중에서도 통제를 유지하며 나아가는 부대가 있었다.
그곳에는 루비오나 장갑병의 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여왕직속부대로 명성이 자자한 오로루 부대의 모습도 보였다.
트레이드 영구요새가 루비오나 왕국을 지키는 '방패'라면, 장갑병은 적을 파괴하는 창과 같은 존재다.
그 화력은 다른 부대를 훨씬 능가했다.
아무리 거대전함이라 하더라도 결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룬왈드의 생각이었다.

두우웅
두우우우우우웅
장갑병의 포격이 시작되고 거대 전함에 불기둥이 치솟는다.
전함도 장갑병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퍼부었지만, 그 거대한 몸짓 탓에 움직임이 느려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할 수 없었다.
장갑병은 자신들의 기동력을 살려 거대전함을 향해 과감하게 덤벼들었다.

이윽고 갈레온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추락한다!"
"해치웠어!"
지금까지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왕국군이 환희의 함성을 질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제국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전황은 역전되었다.
"지금이다! 돌격하라!"
그룬왈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직접 선두에 서서 갈레온이 추락하는 곳으로 돌진했다.
눈앞의 제국병사를 닥치는 대로 베고 찔러 죽인다.
적의 피가 그룬왈드의 망토를 붉게 물들였고, 그의 칼끝은 인간의 뼈를 박살 낸 대가로 약간의 손상을 입었다.

쿠구우우웅
이윽고 갈레온은 땅을 울리며 지면에 착륙했다.
갑판 위에는 왕국병과 제국병이 뒤섞여 매 순간순간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런 싸움의 한 가운데 야릇한 모습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그 손에는 지휘봉이 있다.
상대의 피로 피투성이가 된 처참한 모습으로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룬왈드는 그 모습에 약간은 공감이 갔다.

"네놈이 지휘관인가?"
그룬왈드가 묻자 여장군은 아름답게 미소 지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누구?"
"그룬왈드 론즈브라우다."
"그래... 당신이 그 그룬왈드인가..."
여장군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수많은 시체 한가운데서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룬왈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목숨, 내가 받아 가지."
그렇게 말하고 몸을 굽혀 돌진한다.
순식간에 여장군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높이 쳐든 검을 힘껏 내리쳤다.
챙!
순간 여장군이 얼음 방패로 자신의 몸을 감싼다.
그러나 그룬왈드의 칼끝은 여장군에게 약간의 상처를 입혔다.
"큭!"
그룬왈드는 갑자기 보인 기술에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 기세를 몰아 인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검을 내리칠 때마다 여장군의 몸을 지키는 얼음 방패를 깎아내며 한 발씩 다가갔다.
"커억!?"
마침내 여장군은 그룬왈드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몸의 균형을 잃고 뱃머리로 나가떨어졌다.
"이제 도망갈 곳은 없다...... 죽어라!"
상대에게 다시 일어설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돌진했다.
그룬왈드의 몸이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여장군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즉시, 그룬왈드가 강하게 휘두른 칼날은 여장군의 몸을 관통했다.
"큭......"
창백해진 여장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룬왈드의 칼을 보았다.
그리고, "...난, 아직..."이라고 중얼거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가?"
그룬왈드는 대수롭지 않게 칼을 뽑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평상시와는 다른, 딱딱하고 무기질의 것이었다.
"네놈..."
'사람이 아니군'이라는 말을 하려다 그룬왈드가 멈췄다.
그러나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그룬왈드는 사람만 죽였던 것이 아니다.
짐승, 자동인형, 소용돌이의 괴물.
그리고 지금은 자기 자신도 '사람'이 아니다.
"아니, 말할 리 없겠지. 죽으면 모두 같다."
그렇게 말한 그룬왈드의 얼굴에는 조소가 배어 있었다.

철벅.
검을 들어 올린 그룬왈드의 등 뒤에서 불쾌한 소리가 났다.
뭔가가 끈적한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룬왈드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큭"
거기에는 목이 잘리고 한쪽 팔이 없는 시체가 있었다.
그리고 다리를 잃고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시체도 있었다.
이제는 활동을 멈췄어야 할 육체가 휘청거리며 일어서서는 그룬왈드를 향해 왔다.
죽음의 감촉을 탐닉해 온 그룬왈드에게도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네 이놈,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룬왈드가 꿈틀대는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외쳤다.
등 뒤에서 여장군의 종을 울리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을. 당신도 나에게 죽음을 보여줬죠?"
"무슨......"
"자, 죽은 자들이여. 여러분의 손으로 새로운 죽음을 창조하세요!"
그룬왈드가 검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여장군이 소리쳤다.
그 목소리를 들은 눈앞의 시체들이 일제히 그룬왈드를 둘러쌌다.
"큭......"
그룬왈드가 휘두른 검에 시체 하나가 날아간다.
시체는 느리게 움직였고, 하나하나의 전투력은 미미하다.
하지만 공포도, 고통도 모르는 막대한 수의 시체에 둘러싸인 상태에서는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다.
검을 휘두른 오른손이 시체의 배에 푹하고 박힌다.
그 오른손에 몇 개의 입이 물고 늘어져서는 살점을 산산조각낸다.
그것을 떨쳐버리려는 왼손에 시체의 뼈가 박혀서 피가 튄다.
그 피를 핥으려고 더 많은 시체가 몰려든다.
시체들이 그룬왈드의 몸을 으깨고 있었다.
"................................"
죽음이 임박했다.
그룬왈드는 전신의 살이 산산 조각나는 고통 속에서 생각했다.
자신이 창조하고 즐겨왔던 '죽음'에 의해 이번에는 자신이 죽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닥친다.
그것이 지금이다.
눈을 감은 그룬왈드의 입에 자신의 피가 흘러들어온다.
입안으로 녹슨 철을 핥는 듯한 맛이 퍼져간다.
그 순간 만신창이가 된 몸에 한순간 힘이 돌아왔다.
갑자기 삶에 대한 집착이, 다른 사람을 짓밟는 쾌감에 대한 갈망이 끓어오른 것이다.
잠시 전까지 포기했던 뇌에 활력이 돌아온다.
몸 전체에 살이 벗겨지고 한쪽 다리는 거의 너덜너덜해져 있다.
그러나 아직 움직일 수 있다.
그룬왈드는 힘을 축적하고 몸을 돌려서, 자신의 육체를 둘러싼 죽은 자들을 흔들어서 떼어버렸다.
"죽은 자들이여, 평범한 고깃덩어리로 돌아가라!"
그리고 겨우 잡은 검을 휘둘러 엄청난 검압으로 죽은 자들을 날려버렸다.
그룬왈드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흥분된 정신상태와는 반대로 몸은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을 들지 않은 오른쪽 팔꿈치 아래는 사라졌고, 한쪽 다리 대퇴부에는 하얀 뼈가 드러나 있다.
그룬왈드는 죽은 자와 거리를 뒀지만, 이제는 서 있기조차 쉽지 않았다.
장갑병의 포격이 한층 격렬해졌고 그 충격으로 땅이 흔들렸다.
그룬왈드는 비틀거리며 갑판 끝까지 왔다.
죽은 자의 무리가 다시 그룬왈드가 있는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게 된 귀 어딘가에서 저 여장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미소를 띤 그룬왈드가 남아있는 왼쪽 팔로 검을 휘두르려 할 때 죽은 자의 군대와 그룬왈드 사이에 포탄이 떨어졌다.
그룬왈드는 충격으로 의식이 희미해지며 갑판에서 떨어졌다.
온몸의 힘이 빠져 기묘한 형태로 지면에 부딪히고 말았다.

-THE END-

R5편집

그룬왈드 r5

그룬왈드 r5 full

3394년 [벌레]

부옇게 흐려진 시야였지만 어둑어둑한 거성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약 냄새가 나는 자신의 체취와 함께 느껴지는 공기의 냄새는 고향의 것이었다.
그룬왈드는 의식을 찾고 나서 한참 동안 한쪽밖에 없는 눈동자로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운 천정이었다.
단지 이렇게 오랫동안 응시한 적은 없었다.
혼탁한 의식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는 어둡고 축축한 고독한 세계였지만, 마음 편한 세계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기분 나쁘다며 꺼려지고 있었지만 아무 근심거리도 없었다.
그곳은 그냥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인 자신만의 세계였다.

그룬왈드는 갑자기 소리가 지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붕대에 감긴 아래턱에 감각이 없어 지금 자신의 입이 열려있는지 어떤지조차 몰랐다.
이상하게 우물거리는, 무언가가 거품을 내는 듯한 소리만이 방에 울려 퍼졌다.
방에는 아무도 없다.
어떤 반응도 없다.
그리고 이번엔 갑작스러운 졸음을 느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로휀은 한밤중의 갑작스러운 노크에 놀랐다.
로휀의 지하 연구실을 찾아오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어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문을 연 그의 앞에 왕비인 마루라가 있었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아직도 그 고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상의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루라님."
로휀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왕과 왕자를 위해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루라는 어수선한 지하실을 훑어 본 뒤 그렇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로휀은 낡아빠진 의자를 꺼내 마루라를 테이블 쪽으로 불렀다.
"이런 장소에 당신이 오시리라고는... 이 성의 지하에 당신이 찾아올 일은 결코 없을 거로 생각했었습니다."
"울화통 터지는 기억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뭐, 그렇지요."
로휀은 파이프를 꺼냈다.
이제 웬만해서는 피우지 않게 되었지만, 어려운 인물을 상대할 때는 저도 모르게 피우고 싶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번 궁정회의가 3일 후에 있습니다. 당신도 출석하실 거죠?"
마루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네, 물론."
"왕권의 미래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논의가 이루어지겠지요."
이미 왕은 의식이 없었다.
왕자가 귀환하기 직전부터 위독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그리고 그룬왈드 역시 귀환했다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본 적 없었다.
"뭐, 현 상황을 보자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요."
로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왕자의 상태는 이미 궁정 내에서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어요. 그리고 왕의 병세에 대해서는 들었나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한 달도 못 버티겠죠."
"그렇습니까...... 폐하는 오랫동안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을 보내셨습니다."
로휀은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로휀과 왕은 젊을 때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선대 왕이었던 형은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부터는 상담역으로서 긴 시간 동안 왕을 보좌해왔다.
정책이나 왕자들에 대해서도 둘이서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다만 그룬왈드의 추방을 결정한 뒤부터 그와 로휀 사이에는 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가이우스경은 그룬왈드가 살아있음에도 왕권의 이양 이야기를 꺼내겠지요."
"그라면 그렇게 말할 테지요."
"혼란스러운 나라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왕위에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모든 제후에게 호소할 생각이에요."
"역시 그렇겠지요."
"그러니 그룬왈드가 건재하다고 보여주고 싶은 거에요."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당신의 기술로 그를 일으켜 세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해요."
"왕비님,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나는 의수와 의족을 만드는 장인이긴 하지만 의사는 아닙니다."
"아니. 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차라리 폐위하고 제후들에게 양보하는 게 좋겠습니다. 원만하게 말이죠."
그리 말했지만, 말을 한 당사자인 로휀도 일이 원만하게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제후 중 누가 왕이 되든 불만은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음모나 내란을 일으켜 이 나라를 혼란에 빠트릴 것이다.
물론 로휀은 그렇게 되면 이 나라를 떠나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룬왈드도 살해당하고 말 거에요."
"인제 와서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도 느끼신 겁니까?"
"아니요. 왕족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그러시겠지요. 전하를 추방할 때에도 당신은 아무런 불만을 말하지 않았었으니까요."
조금 심한 말투였지만 로휀은 배려 따위 하지 않았다.
"왕도 왕자도 아직 살아있어요. 아직은 터무니없는 의논 따위 하게 두지 않겠어요."
마루라는 꿋꿋하면서도 단호하게 로휀의 빈정거림을 무시했다.
"전하를 구경거리로 만드실 겁니까?"
"아니요. 단지 그룬왈드가 살아 있다고 하는 위엄을 보여 주면 되는 겁니다. 당신은 그룬왈드를 이해하는, 그의 벗이기도 했잖아요?"
로휀은 그녀의 강한 결심을 이해했다.
그것은 그녀가 왕비로서 양보할 수 없는 의지이다.
"전하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전하를 이끌려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위엄을 지킨다고 생각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위엄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해보지요. 단,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될지 보증하긴 어렵습니다."
마루라의 결심에 이끌려 본의 아니게 부탁을 들어주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부탁합니다. 로휀."
마루라는 지하실을 나갔다.
그녀의 향수 냄새만이 어울리지 않게 지하실을 감돌고 있었다.

로휀은 바로 지하실로 그룬왈드를 옮겨와 시술을 시작했다.
그룬왈드 신체의 손상은 막심했다.
양팔과 양다리를 잃고 오른쪽 눈과 아래턱도 잃었다.
고귀함을 자랑하던 그 젊은 육체는 무참히 그리고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로휀은 그룬왈드의 머리에 기묘한 기계를 부착하고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뇌의 피해도 상당할 거라고 로휀은 예상하고 있었다.
"제 목소리가 들리 십니까? 전하."
흐릿하고 분명치 않은 신음 같은 소리와 더불어 로휀이 보고 있던 콘솔에 색과 이미지가 나타났다.
"과연. 참혹한 모습이시지만 이것도 하나의 운명입니다."
로휀은 이제부터 그에게 행할 시술에 대해 설명했다.
"이해되셨습니까?"
기묘한 빛이 콘솔에 나타났다.
그것을 본 로휀은 일순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시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전하를 위한 저의 마지막 충성입니다."
로휀은 냉정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휀은 안경을 고쳐 쓰고 작업을 시작했다.
로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틀에 걸쳐 그룬왈드의 시술을 끝냈다.

가신들이 알현을 위해 대기실에 모여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궁정회의에 왕자가 출석한다는 사실을 듣곤 한결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신들이 의사당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왕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왕자는 후드를 깊숙이 눌러 쓰고 한쪽 눈만을 내놓은 기묘한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양손에는 금속을 조각해 장식한 왕족의 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일순 미심쩍어하던 가신들이었지만 그 눈동자의 색은 틀림없는 그룬왈드의 것이었다.
제후들은 왕자의 앞에서 감탄과 찬양의 소리를 드높였다.
다만 그 섬뜩한 왕자의 모습에 한결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전원이 자리에 착석하고 기묘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가이우스가 견디다 못해 말을 꺼냈다.
"전하가 무사히 귀환하신 일, 그 무사한 모습에 신하와 백성도 반드시 환희의 도가니에......"
그룬왈드는 그 금속 팔을 들어 어색한 동작으로 가이우스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가이우스를 향해 가리켰다.
가이우스는 그 종이를 집어 들고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사지에서 돌아왔다. 거기서 얻은 것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다. 반드시 제후들에게도 그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가이우스는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면서 더듬더듬 소리 내어 읽었다.
가이우스가 읽는 것을 끝냄과 동시에 그룬왈드는 양팔에 장착해둔 산탄을 좌우에 정렬한 제후들을 향해 한 번씩 발사했다.
폭음과 화약의 연기, 새빨간 피보라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룬왈드의 바로 옆에 있던 가이우스는 탄환을 맞지 않았지만, 산산 조각난 가신들의 살점이 그의 얼굴에 튀었다.
"미치신 겁니까? 전하!"
가이우스가 그렇게 소리쳤을 때, 그룬왈드는 기계로 만들어진 목소리로 웃고 있었다.
다만 그 웃음소리는 뭔가가 지옥에서 끓고 있는 듯, 기묘하게 부글부글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려움에 멍하니 서 있는 가이우스의 머리를 팔에 장착되어 있던 칼날로 턱에서 정수리까지 꿰뚫었다.
좌우에 서 있던 가신 중에서 살아남은 네 명이 기다시피 그룬왈드를 피해 도망치려 했다.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룬왈드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무릎 아래쪽의 의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그대로 마루에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넘어진 그룬왈드는 그대로 무릎과 손으로 기어서 그들을 쫓아갔다.
그리고 의수의 칼날을 지팡이처럼 사용해 일어나 도망치는 네 명의 등을 찢어발겼다.
그룬왈드는 피바다가 된 의사당에서 기묘하게 휘어진 사지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짓궂은 장난에 성공했을 때처럼 몸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룬왈드는 위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의수와 의족을 제거당한 채 원래의 거실에 유폐되었다.
이번 흉사는 아직 성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로휀은 성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엄청난 혼란이 이 나라를 덮치리라는 것은 마루라도 알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그룬왈드는 엷게 피가 번진 하얀 붕대에 감긴 채 울타리가 있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그룬왈드는 아무 반응 없이 자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왕도 나도,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하는 겁니까."
마루라는 울고 있었다.
"왕자의 존엄성도 눈부신 역사도 전부 당신이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방에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울리고 있었다.
"저나 왕이 잘못한 겁니까? 당신이 바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문득 그룬왈드를 쳐다보니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마루라는 그 눈이 웃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아니, 분명히 웃고 있었다.

마루라는 가슴팍에서 얇고 예리한 단검을 꺼내 그룬왈드의 가슴을 찔렀다.
벌레 같이 몸부림치는 그룬왈드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단검을 찔렀다.
붕대에 감겨있는 몸에서 붉은 반점이 생겨나 점점 꽃이 피는 것처럼 퍼지고 있었다.
왕비의 얼굴도 손도 모든 것이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침대를 가득 채운 그룬왈드의 피가 한 방울 한 방울 마루로 떨어져 내렸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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